🌾 백색 가루의 설계도: T55, 00호, 그리고 강력분의 비밀
Decoding the Global Flour Classification System
1. 등급의 기준: 태워보는 프랑스 vs 갈아보는 이탈리아
세계 제빵 문화의 양대 산맥인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밀가루를 분류하는 기준부터 철학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베이킹의 첫걸음입니다.
🇫🇷 프랑스: 회분(Ash) 함량에 따른 'Type(T)' 분류
프랑스는 밀가루를 600°C 고온에서 태웠을 때 남는 재(미네랄)의 양, 즉 '회분 함량'을 기준으로 등급을 나눕니다. 숫자가 낮을수록 정제가 많이 되어 하얗고 미네랄이 적으며, 숫자가 높을수록 통밀에 가깝고 껍질의 풍미가 강합니다. 바게트의 표준인 T55는 적당한 미네랄 덕분에 발효 향이 풍부하면서도, 가벼운 내상(Crumb)을 만들 수 있는 황금 비율을 자랑합니다.
🇮🇹 이탈리아: 입자 크기에 따른 '00' 분류
이탈리아는 밀가루 입자의 '고운 정도(Milling)'에 집착합니다. 가장 고운 'Tipo 00'부터 0, 1, 2, 통밀(Integrale)로 나뉩니다. 피자와 파스타의 본고장답게, 입자가 아기 분가루처럼 고운 00호 밀가루는 수분을 빠르게 흡수하고 반죽을 얇게 펴도 찢어지지 않는 극강의 신장성(Extensibility)을 제공합니다.
🇰🇷🇯🇵 아시아: 단백질 함량에 따른 '강력/중력/박력'
한국과 일본은 밀가루 속 '단백질(글루텐)'의 양을 최우선으로 봅니다. 단백질 11~13% 이상의 강력분은 쫄깃한 식감과 부피감(Volume)을 중시하는 식빵 문화에 최적화된 분류법입니다.
2. 성분 과학: 회분(Mineral)과 글루텐의 역학 관계
많은 홈베이커들이 "강력분 대신 T55를 써도 되나요?"라고 묻습니다. 답은 "가능하지만 결과물은 완전히 다르다"입니다. 핵심은 회분과 글루텐의 역할 차이입니다.
회분(미네랄)은 효모의 영양분입니다. T55나 T65처럼 회분 함량이 높은 밀가루는 효모 활동을 촉진해 복합적인 발효 풍미를 만들어내며, 껍질을 두껍고 바삭하게(Hard Crust) 만듭니다. 반면, 한국의 강력분은 회분 함량은 낮지만 단백질이 많아 구조 형성에 유리합니다. 따라서 강력분으로 바게트를 만들면 부피는 크지만 껍질이 질겨지고 풍미가 단순해질 수 있습니다.
| 등급 명칭 | 주요 특징 | 최적의 용도 |
|---|---|---|
| 프랑스 T45 | 고도로 정제됨, 가벼움 | 페이스트리, 브리오슈, 케이크 |
| 프랑스 T55 | 적당한 미네랄, 밸런스 | 바게트, 사워도우, 크루아상 |
| 이탈리아 Tipo 00 | 매우 고운 입자, 높은 신장성 | 나폴리 피자, 생면 파스타 |
| 한국/일본 강력분 | 높은 단백질, 쫄깃함 | 식빵, 단과자빵, 베이글 |
3. 마스터 레시피: 00호 밀가루로 만드는 '48시간 나폴리 도우'
이탈리아 00호 밀가루의 부드러운 입자와 신장성을 극대화한 정통 피자 도우 레시피입니다. 집에서도 화덕 피자 특유의 '에어 포켓(Cornicione)'을 만들 수 있습니다.
🥣 재료 준비 (지름 30cm 피자 2판)
- 이탈리아 밀가루 (Tipo 00): 300g (카푸토(Caputo) 제품 추천)
- 찬물: 195g (수분율 65%)
- 소금: 9g (3% - 짭조름해야 도우 맛이 삽니다)
- 생이스트: 1g (또는 드라이이스트 0.3g - 극소량)
👨🍳 베이킹 프로세스
- 저속 반죽: 물에 이스트를 풀고 밀가루를 넣습니다. 날가루가 없을 때까지 섞은 뒤 소금을 넣고 10분간 손으로 치댑니다. 00호 밀가루는 입자가 고와서 글루텐이 천천히 잡히므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 1차 발효 (상온): 매끈해진 반죽을 볼에 담고 랩을 씌워 상온(20~23°C)에서 2시간 둡니다.
- 2차 발효 (저온 숙성): 반죽을 2등분(약 250g씩)하여 둥글리기 한 뒤, 밀폐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서 24~48시간 숙성합니다. 이 과정에서 00호 밀가루 특유의 풍미가 폭발합니다.
- 성형 (손으로): 냉장고에서 꺼낸 반죽을 2시간 동안 실온화합니다. 밀대(Rolling Pin)를 절대 쓰지 말고, 손가락으로 가운데서 바깥으로 공기를 밀어내며 테두리(코르니초네)를 살려 폅니다.
- 굽기: 프라이팬에 도우를 올려 밑면을 바삭하게 구운 뒤, 토핑을 올리고 에어프라이어(최고 온도)나 오븐 상단에서 윗면을 빠르게 구워냅니다.
* 팁: 밀대를 쓰면 기포가 다 죽어버려 납작한 과자가 됩니다. 00호 밀가루는 신축성이 좋아 손으로도 잘 늘어납니다.
4. 2026 트렌드: 스톤 밀(Stone Mill)과 고대 밀의 귀환
2026년 제분 업계의 트렌드는 '거칠고 원시적인 것'으로의 회귀입니다. 매끈하게 정제된 흰 밀가루(Roller Mill) 대신, 맷돌 방식으로 제분하여 밀의 배아와 껍질을 살린 '스톤 밀(Stone Milled)' 밀가루가 T80, T110 등의 이름으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또한, 스펠트(Spelt), 엠머(Emmer), 호라산(Kamut) 등 고대 밀(Ancient Grains)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현대 개량 밀보다 글루텐 구조가 약하지만, 소화가 훨씬 잘되고 견과류 같은 고소한 풍미를 지니고 있어 '속 편한 빵'을 찾는 현대 소비자들에게 각광받고 있습니다. 한국의 베이커리들 또한 우리 밀인 '앉은뱅이 밀'을 사용하여 T65급의 한국형 바게트를 개발하는 등 로컬 밀가루의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